토머스 핀천

토머스 핀천은 1937년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태어났고 코넬 대학을 다니던 중 해군에서 복무했다. 대학 졸업 후 보잉 사에서 기술서 작성 업무를 보다가 첫 소설 'V.'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핀천은 작품 발표 외에 대중에게서 모습을 감췄다. 인터뷰도 없었고 사진도 없었다. 언론은 이런 그에게 '은둔자'라는 라벨을 붙여줬지만 핀천의 말에 따르면 '은둔자'라는 라벨은 인터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언론이 붙이는 '암호명'이다. 그는 아마 그저 자기 뻐드렁니가 창피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대중에게 핀천은 작품들보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로서 더 알려졌지만 결코 그가 그것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도 언론의 인터뷰를 완강히 거부해왔지만 (그 이유는 물론 인터뷰를 요청하는 언론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거기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핀천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당연히 그의 작품들이다.

핀천은 초기에 발표한 단편 소설 몇 편 외에 (알려진 작품 중 한 편만 빼고 모두 그의 단편집 '늦게 배우는 사람'에 수록됐다) 세 편의 '짧은 소설' ('49호 경매품의 외침', '바인랜드', '고유의 하자')과 네 편의 '긴 소설' ('브이.', '중력의 무지개', '메이슨과 딕슨', '그날이 올 때까지 (Against the Day)')을 썼다. '짧은 소설'들은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현대를 그리고 있고 '긴 소설'들은 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를 배경으로 중요한 역사적 시기들을 다루고 있다.

핀천의 트레이드마크라면 만화경 같은 플롯, 빈틈없는 묘사,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없는 수용, 과학기술의 완벽한 차용, 피해망상적 역사 인식 등을 들 수 있다. 또 빼먹을 수 없는 것이 언제 노래를 부르며 브로드웨이 배우처럼 춤을 추기 시작할 지 모를 괴짜 등장 인물들이다. 그의 소설에서는 워싱턴도 자기 하인에게 스탠드업 코메디를 시키며 마리화나를 피운다. 이런 등장인물들은 역사라는 무채색 배경 위에 잉크를 쏟은 듯 여러가지 색깔의 얼룩이 번지게 한다. 어차피 '열역학적 죽음'으로 향하는 우주지만 그 위에서 나름의 춤을 추며 '저 건너 세상'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러나 가끔씩 엉뚱한 곳에서 그 옷자락을 내비치는 신의 구원을 기다린다. 그들의 춤이 역사의 타락을, 엔트로피의 증가를 실제로 늦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이 올 때까지.

그의 첫 장편 소설인 '브이.'는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베니 프로페인은 해군에서 제대하여 혼란스런 현대의 뉴욕에서, 방탕한 예술가 집단을 만든 무의미한 것만 같은 고뇌에 찬 젊은이들과 섞여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허버트 스텐실은 그의 아버지의 글에서 '역사의 위기'의 순간마다 등장하는 '브이.'라는 여인에 대한 얘기를 발견하고 그 여인의 정체를 찾아 탐정처럼 역사의 흔적을 뒤진다. 이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스텐실이 프로페인을 데리고 말타로 향하면서 V자 모양으로 합쳐진다.

1966년 발표된 '49호 경매품의 외침'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는 '트리스테로'라는 비밀 집단의 존재를 추적하는 여주인공 에디파 마스(주인공의 이름을 잘못 읽으면 '오이디푸스, 헛소리'가 된다)의 이야기이다. 실제 존재하는 것인지 보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식들을 따라 미궁 속을 헤매며 음모를 파헤쳐간다는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이후 수없이 많은 소설에서 차용되었으며 유명한 예를 들자면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가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소음기를 단 나팔의 그림은 60년대 대항문화의 상징 중 하나가 됐다.

7년의 공백 후 발표한 '중력의 무지개'는 공백 기간이 어떻게 그것 밖에는 안 됐는지, 어떻게 7년 만에 이런 괴물을 만들어냈는지 의아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2차세계대전 말기 독일의 V2로켓 공격 하에 놓인 런던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로켓의 포물선 궤적을 추적해가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의 폭력적인 변증법과 회귀, 인간의 숙명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후의 공백은 더 길었다. '중력의 무지개'가 발표되고 17년 후 발표된 '바인랜드'는 1980년대가 되었는데도 아직 히피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미치광이 짓을 해 국가 의료 예산을 타먹으며 홀로 딸 프레어리를 키우는 조이드 휠러가 헤어진 아내 프레네시를 추적하는 FBI 요원들과 겪는 갈등을 다루고 있으며 60년대 반 문화 운동과 그 여파, 그리고 그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폭력적인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대중문화의 포화된 영향력 속의 삶을 보여주면서 고급문화를 철저히 배제하고 대중문화에 대한 언급 만을 하고 있으며 플롯도 공중 납치, 닌자 수련원, 비밀 살인 권법 등의 '싸구려 장르 문학'에서 차용했다.

유명한 평론가 마이클 더다는 '메이슨과 딕슨'(1997)을 보면 핀천의 천재성의 한계를 알 수 없다고 한다. 메이슨과 딕슨은 미국 독립 전 펜실바니아와 매릴랜드 사이의 논쟁에 휩싸인 주 경계를 결정하기 위해 40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측량했다.

이들이 그은 선은 이후 남북 전쟁에서 남과 북을 가르는 경계의 일부가 되면서 역사적 의미를 띠게 된다. 소설은 영국의 천문학자 메이슨과 측량가 딕슨이 금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남아프리카의 식민지 상황은 주인공들이 미국으로 측량 여행을 떠나며 미국의 인종 문제, 인디언과의 갈등 문제와 연결된다. 소설은 주인공들이 서쪽으로 측량을 해가며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가능했었을 지도 모르는' 미국의 다른 역사를 꿈꾼다. 또한 두 주인공의 우정을 통해

그동안 보기 쉽지 않던 작가의 감상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날을 기다리며'(2006)는 핀천의 소설 중 가장 긴 소설이다. (핀천의 소설들이 길기로 유명하기에 이건 정말 쉽지 않은 기록이다.) 소설은 1893년 시카고 세계 엑스포에서 시작해 1차 세계대전 발발 시점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 역정을 다루고 있다. 초인지능력을 가진 탐정, 노동운동가, 수학도, 사진가, 자본가 들을 포함한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마치 세계를 담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 같은 소설이다. 특히 기구를 타고 다니는 10대들의 모임인 '우연의 벗들'이 펼치는 모험은 소설의 플롯의 뼈대가 된다. 여러 개의 줄기를 꼬아 놓은 형태의 플롯을 갖고 있고 각각의 줄기는 다른 장르의 스타일로 서술된다.

여러가지 실험적 시도가 있지만 이 소설은 다른 소설과 비교해 꽤 선형적인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역사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여전히 주요한 배경을 이룬다.

'고유한 하자'는 핀천의 유일한 '장르 소설'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들을 연상시키는 도입부를 포함해 전체 구성이 정통 탐정 소설의 구성을 따른다. 60년대 반 문화 운동이 맨슨의 살육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숨결이 끊어져가던 1970년, 마리화나에 절은 탐정 닥 스포텔로는 전 여자친구가 연루된 공갈 음모를 수사하다가 부동산 거물이 연루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게 된다.

핀천의 소설들이 장대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에 대한 통찰, 문명 사회와 지식에 대한 비판 등. 그러나 핀천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소설로서의 재미이다. 핀천만한 이야기꾼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그 자체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독자의 머리 속에 서서히 무의식적인 형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멋진 나무들과 여러 동물들의 모습을 감상하며 오솔길을 지나고 나면 독자는 방금 자기가 지난 숲이 얼마나 웅장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중력의 무지개' 한글판에 수정 게재된 내용입니다.